반복된 검은 선으로 완성된 작품. 드로잉 아티스트 성립의 작품은 오직 검은 펜 하나로 완성된다. 그리고 역시 검은 펜으로 작품과 함께 하는 글을 남긴다. 내면의 이야기를 글과 드로잉으로 풀어내는 성립의 작품을 가장 명확하게 보는 방식은 자신의 내면을 대입해서 바라보는 거다. “내 작품에 본인을 적극적으로 투명시켰으면 한다. 간혹 내 그림과 글을 보고 나보다 더 많은 생각을 풀어내는 사람을 봤다. 나는 그런 부분이 재미있다.” 오직 검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명확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많은 가능성을 품은 성립의 작품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아티스트 성립은 그래서 검은색이 매력적이라 말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다. 작업실에 어릴 때 그린 작품도 걸려있는데?
5살 때부터 미술학원을 다녔다. 그때부터 그림을 그림 그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처음에는 하늘을 그렸는데,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하늘색이 파란 게 괜히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하늘을 까맣게 그렸었다.
검은색을 메인으로 하는 작가가 될 운명이었던 걸까?
그 때부터 검은색과 연결되지 않았을까 싶기도하다.
그림 그리는 것에 어떤 매력을 느낀 건가?
그릴 때 손에 느껴지는 질감이 좋다. 최근에는 아이패드로 그리는 방식도 있어서 시도를 해봤는데, 그건 손에 느껴지는 게 없으니 재미가 없더라. 손맛 때문에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에 매료되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계속 고민하는 부분이다. 찾은 게 있다면, 내가 느끼는 결핍들에 공감하는 것일 거다. 나는 완전한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딘가 모자라거나 부족한 듯한 그림을 그린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결핍이나 불완전함, 그걸 보여줌으로서 다른 사람들도 결핍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작업을 보면서 모자란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에 흥미가 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유화나 일러스트 작업도 했었다. 지금은 드로잉으로 영역을 확정한 이유가 있을까?
유화나 다른 작업을 할 때는 완전해보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작품. 한 번은 왜 그런 방식을 좋아하나 생각해봤는데, 다른 사람들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봤을 때 ‘이만큼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다. 그런데 그건 온전한 내 작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림 그리는 시간을 짧게 줄였다. 정말 해야할 것 같은 그림을 그리다 보니 드로잉이라는 영역이 보였다.
성립은 작가가 되면서 직접 만든 이름이다. 어떤 뜻인가?
대학교 때 지은 이름이다. 드로잉이라는 영역을 선택하면서 이걸 작업으로서 이끌어낼 수 있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립’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내가 성씨이기도 하고.
드로잉 작업 하면서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어떤 글을 항상 남기는 편이다.
예전에는 제목의 형식으로 글을 썼었다. 드로잉에 있어서 글의 분량이 많아질 수록 불리하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2년 사이에 드로잉 만큼 글에 흥미를 가지는 중이다. 글도 추상적일 수 있고, 아무리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도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생각하면서 글을 읽으니까. 그런 맥락에서 드로잉도 글이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드로잉과 글이 같이 있을 때의 시너지를 생각하는 편이다.
글과 그림 중 작업할 때 무엇이 먼저인가?
글을 먼저 쓴다. 어떤 단어라도 생각이 나면 메모를 해놨다가 그걸 길게 풀어내면서 그림을 떠올린다.
검은색, 반복적인 선이 가장 큰 특징이다. 언제부터 추구한 스타일인가?
2012년부터 드로잉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드로잉도 유화처럼 완전한 그림으로 그리려고 했다. 그러다 선적인 요소들에 흥미가 생겨서 그 부분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반복된 선을 쓰는 이유는 외곽을 뚜렷하게 만들면 누가봐도 정체를 알 수 있는, 경계가 뚜렷한 그림이 싫어서 선택한 방식이다. 지금도 스타일은 계속해서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그림체에 대한 고민보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최근에 작업하는 친구들과 토론을 하다 장소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생각해보니 내 그림에는 장소성이 없더라. 사람의 모든 기억에는 장소가 배경으로 깔리는데도 불구하고 내 작업을 풀어낼 때는 장소가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주류와 비주류로 얘기를 하자면, 내 그림에는 장소가 비주류고 인물의 상황이 주류인 거다. 그 부분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검은색을 선택한 건 가장 좋아하는 색이기 때문일까?
그렇다. 명료해서 좋아한다. 물감의 색을 다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 그것처럼 검은색이 뭔가 여지가 많은 색이라 생각한다.
보통은 흰색을 그런 색으로 여긴다.
맞다. 그런데 나는 검은색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더라.
작업 외에도 검은색을 즐기는 편인가?
사실 전자제품도 다 검은색을 사는 편이다. 다른 색이 있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 옷이나 소품도 검은색이 대부분이다. 아, 작업실에 빨간색 옷이 하나 걸려있긴 한데 저건 일종의 부적같은 거다.
작업에 자극을 주는 것들은 무엇인가?
음악. 작업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뮤지션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어릴 때 린킨파크나 크리스탈 캐슬의 음악에 빠져있었다. 그 외에 영향을 받는 아티스트들은 많다. 영상감독 크리스 커닝햄의 작품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뮤지션과 협업을 많이 했다. 임슬옹, 카더가든 등.
개인적으로 가장 욕심내는 작업이 음악과의 협업이다. 음악과 시각이 만났을 때 시너지에 흥미를 느낀다.
혹시 작업해보고 싶은 뮤지션이 있나?
국내에서는 짙은. 톰 미쉬와의 작업도 좋을 것 같다.
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서 올리는 유튜브 계정이 있다.
영상도 직접 찍고 있다. 애니메이션 작업도 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영상에 대한 기본적인 툴을 다룰 줄 알게 되었다. 그림 그리는 걸 기록으로 남겨 놓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했다.
언젠가 영상처럼 작품을 다른 매체로도 풀어볼 수 있다면 어떤 시도를 해보고 싶나?
어떤 공간을 가득 채워보고 싶다. 영상이든 드로잉이든 보는 사람이 그림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